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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예창작의 정석 개정판

관리자   /   2023-06-20

 

 

 

 

 

책 소개

문학이라 부르고 문예로 쓴다

 

기본이라는 말이 있다. 사물, 현상 시설 따위의 기초와 근본이라는 말이다. 어떠한 일을 하는데 있어서 기본기가 탄탄하다. 기본에 충실하다라는 말을 사용할 때 완성도가 높아진다. 반대로 완성도가 낮을 때는 기본을 무시했다, 기본이 없다는 말을 듣게 된다.

시를 쓰고 소설을 쓰면서 기본에 대해서 생각해 본 사람들은 없을 것이다. 창작 이론을 기본으로 받아들이고, 창작 이론에 충실했을 때 좋은 작품이 나온다고 믿는다.

이론을 떠나서 시는 언어를 창작하는 것이고, 소설은 이야기를 창작하는 것이라는 기본을 안고 시작하면 훨씬 좋은 작품이 나올 수 있다는 것이다. 예컨대, 문예 활동의 기본을 문학적 이론이 아니고 문예적 창작으로 받아들일 때 완성도 높은 문예 작품이 나온다는 것이다.

자고로 문학은 문예를 모체(母體)로 해서 형성이 된 학문이다. 그런데도 작금의 현실은 문예를 문학의 하위 장으로 수용하고 있다. 이 말은, 문예를 학문적으로 수용하겠다는 의지와 다를 바 없다.

문학은 조선시대까지만 해도 학문을 뜻하는 단어였다. 조선시대 때의 문학은 지금의 문예와 완전히 다른 기준이었다. 문학은 소극적인 의미의 시소설희곡 같은 것만 총칭하는 것만 아니다. 인간의 사상과 감정을 언어로 사용함으로써 표현되는 학문 모두를 일컫는 말이다. 이를 태면 글()을 매개로 하는 모든 학문을 통 틀어서 글자 그대로 문학(文學)이라고 한다.

문학판에서 가장 권위가 있는 노벨문학상이 이것을 잘 증명해 주고 있다. 문학이 문예라면 노벨문학상을 소설이나 시, 혹은 희곡을 쓰는 사람들에게만 주어져야 한다. 하지만 2016년의 노벨문학상 수상자는 미국의 밥딜런(Bob Dylan)이다.

언론이나 문학을 하는 사람들은 문학가가 아닌 사람이 노벨상을 받았다고 호들갑을 떨었지만, 작가나 시인이 아닌 사람이 노벨상을 받는 사람은 밥딜런이 처음은 아니다. 독일의 역사학자 테오드르 몸젠(Theodor Mommsen), 영국의 수상 처칠은 자서전으로 노벨상을 받았다. 베르그송은 철학자이나 아름다운 프랑스어 문체를 가졌다는 이유로 노벨상을 받았다. 이처럼 문학을 광의적인 시각으로 본다면 문예와 거리가 있다.

글로 예술 행위를 하는 것을 문예가 아닌 문학이라고 부르기 시작한 것은 일제강압기 시대의 소설가 이광수가 효시이고, 일제 강점기에 문예를 잡한 문인들의 영향이 크다.

문예는 예술이다

문예(文藝)는 글()을 매개로 예술 행위를 하는 것이다. 문예를 논하려면 먼저 예술을 알아야 한다는 점이다. 물론 넓은 의미로 볼 때 창작을 한다는 것 자체가 예술행위라고 주장할 수도 있다.

문예에서 요구하는 창작적 접근이 예술적 행위라고 생각하면 선과 후가 바뀐 것이다.

예술을 염두에 두지 않고 글쓰기를 하는 것은 컴퓨터 프로그래머가 컴퓨터의 원리를 모르는 상황에서 하드웨어 교육을 받는 것과 같은 이치다. 그런데도 문예 교육의 현장에서는 예술의 예()조차 언급하지 않고 시창작이며, 소설창작 방법을 학문적으로 전달하고 있다.

음악의 본질은 감정의 언어이며 한정된 시간 안에 소리로 나타나는 시간 예술이라는 것이다. 미술의 본질은 느낌과 생각을 시각적으로 표현하는 예술이다. 문예의 본질은 당연히 언어로 작가의 사상이나 감정을 나타내는 예술 행위이다.

문예를 하려면 당연히 예술을 바탕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예술의 본질은 아름다움을 창작해 내는 것이다. 아름다움의 본질은 ()이다. 선은 예술 행위를 하는데 기본적인 바탕이다. 글을 쓰는데 있어서 진실적 글쓰기는 예술을 기본으로 한 글쓰기 방법이라는 것이다.

문예는 모든 예술의 중심이라 할 수 있다. 문예를 근간으로 하지 않는 예술은 없다. 당연히 문예창작을 하는데 있어서도 예술 정신이 근간을 이루고 있을 때 보다 좋은 작품들을 생산해 낼 수 있다. 그러므로 문예창작 교육은 예술정신 교육이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문예는 학문의 영역이 아니다

요즈음 글을 쓰는 사람들 사이에 문학이 죽고 있다는 탄식조가 여울처럼 흘러 다닌다. 기실(其實) 문학은 활발하게 진행 중이다. 사양길을 걷고 있는 것은 문학이 아니라 문예이다.

언젠가부터 이 땅에는 문학이 문예의 땅을 식민지로 만들어 버렸다. 문예를 우대하지 않고 문학을 우대하다 보니까 문학을 위한 문예가 되고 말았다.

요즈음 제도권은 물론이고 문화센터를 비롯해서 평생교육원 등에서 문예 교육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문예는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창작 방법을 지도해야 학습효과를 얻을 수가 있다.

작금의 문예 교육은 교수자가 문예를 학문적으로 지도하고 있다는 점이다. 학문은 어떤 분야를 체계적으로 배워서 익히거나, 또는 그런 지식을 뜻한다.

문에를 학문적으로 지도한다는 것은 교수자가 알고 있는 문예지식을 피교육생들에게 전해주는 교육방법이다.

이를 테면 교수자의 전공이 모더니즘 계열이면 모더니즘 글쓰기 방법만 교육한다는 것이다. 피교육자들의 문예적 성향이 모더니즘 계열이 아니면 안 된다는 식으로 교육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문예적 교육은 당연히 창작을 앞세운 방법으로 진행이 되어야 한다. 창작을 앞세운 교육은 피교육생의 성향을 먼저 존중해주어야 한다.

피교육생이 서정적 글쓰기를 좋아한다면 서정적 글쓰기 차원에서 교육을 하고, 모더니즘 계열이면 교수자 성향이 서정적이라도 모더니즘 시선에서 교육을 하는 것이 창작을 앞세운 교육 방법이다.

문예를 학문적으로 지도하는 것은 창작하는 방법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고, 글을 쓰는 기교를 교육하는 측면이 강하다. 그것에 따른 부작용으로 시인이나 작가들이 문예를 하는 기간이 짧다는 점을 들 수가 있다.

50년대 작가들 대부분 평생 글쓰기를 통해 작품을 후세들에게 남기고 있다. 요즘 작가들의 집필 기간이 예전 작가들보다 짧은 이유는 문예를 창작의 본질보다 기교적 측면을 앞세우는 교육 방법에 있다.

글을 매개로 하는 예술은 시나, 소설 희곡 등 어느 장르에 머무르지 말고 모든 문예작품을 생산해 낼 수 있어야 한다. 이른바 문예인들이 많이 배출되어야 한다. 괴테나 셰익스피어나, 헤르만테스처럼 어느 장르를 가리지 않고 모두 생산해 낼 줄 알아야 문예 작품의 폭이 넓어지고 깊이가 깊어질 것으로 믿는다.

문예창작의 정석

학교 선생이 되려면 교육대학에 진학을 하거나, 일반대학에서는 교직 과정을 이수해야 가능하다. 얼핏 굳이 교육대학이나 교직과정을 이수하지 않아도 충분히 학생들을 가르칠 수 있는데 왜? 하는 반문이 일어날 수 있다.

어떠한 지식을 내가 전수받는 것과, 내가 알고 있는 지식을 누구에겐가 전수시켜주는 것은 엄격히 다르다. 지도하는 방법은 지식을 전수해 주기 이전에 교육방법을 알아야 한다. 단순히 내가 아는 지식을 그대도 전해주면 교육생들의 성향이 모두 달라서 학습효과가 약해질 수밖에 없다.

글쓰기 방법도 그렇다.

교육생들의 성향을 무시해 버리고 교수자가 알고 있는 지식을 그대로 전수해 주면서 높은 학습효과를 얻을 수는 없다.

혹자들은 다른 예술과 다르게 문예는 글쓰는 사람들의 사상을 중요시 하는 예술이라서 미술이나 음악처럼 일괄적인 교육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구체적은 창작법이 아니라 일반적으로 공통되는 개론만 교육할 수가 없다고 반박한다.

일부는 수용할 수 있는 반박이다. 문예작법서에 나오는 수백 편의 유명한 작품을 샘플로 보여주고, 이렇게 쓰면 된다고 하는 점은 올바른 창작 교육방법이라 할 수 없는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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